한국에서 '빨갱이'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08.20 22:14
좀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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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좌익’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정치적·사회적인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이 용어가 사용되는 그 순간부터 주장의 정당성은 일거에 박탈되고, 대상자들은 침묵에 빠져든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 장인의 빨치산 활동을 공격했다. 정치권에서 늘 있어왔던 ‘색깔 공세’였고, 이러한 공격은 늘 상대편을 수세에 몰리게끔 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그러면 사랑하는 내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 “그렇게 되면 후보를 사퇴하겠다”고 반격했다. 이 발언으로 전세는 역전됐고, 이인제 후보는 결국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여순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가족들. 뒷편에 우뚝 서있는 사람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원인 랠프 블리스(Ralph P. Bliss) 소령.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왜 이 발언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노무현을 지지하도록 했을까? 노무현은 장인의 좌익 활동을 변호하지도 않았고, 자신에 대한 공격이 근거 없는 색깔론이라고도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짧은 대답은 정치권에서 횡행하던 색깔론 공격을 무력하게 했다.
노무현은 한국 현대사에서 ‘좌익’과 ‘빨갱이’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 수는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발언은 좌익 공격 논리의 가장 약한 고리를 파고든 셈이었다. 노무현의 대답은 ‘좌익도 결국은 인간’임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좌익 세력은 모든 사회 혼란의 원인이자,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취급된다. ‘빨갱이’는 이러한 뜻을 담고 있는 멸시적 용어이다. 이같은 이미지와 인식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죽여도 되는 존재인 ‘빨갱이’
먼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와 ‘빨갱이’는 전혀 다른 내포와 맥락, 이미지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이 용어들은 한국 현대사의 진행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공산주의자는 독립을 가장 앞장서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해방 직후에도 공산주의자는 진보적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는 우익 세력의 정치적 경쟁자일 뿐이었다.
한국에서 ‘빨갱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계보학적 과정을 추적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여순 사건’이다. 1948년 10월 19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 만에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제주도 토벌 출동반대’를 외치며 봉기를 일으킨 이 사건은 군인 봉기에 호응한 지역 좌익 세력·학생·주민들이 합세하면서 ‘대중 봉기’로 발전했다.
여순 사건은 봉기와 정부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군인·경찰과 민간인이 죽음을 당한 유혈적 사건이었다. 진압군은 각 지역을 점령한 뒤,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협력자 색출을 시작했다. 우익과 경찰에게 지목된 지역 주민들은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됐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증언자는 “거기는 아주 지옥이었어. 칼빈으로 막 쏴 죽이더라고. 끌려온 사람한테 앉아 있는 사람 중 반란군 협조자를 골라내라고 하더니 지목당한 사람을 옆으로 끌고 가서 쏴 죽였어요. 지목당한 사람은 가차 없이 사람들 있는 앞에서 칼빈총으로 쏴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지역에서 존경받는 중학교 교장, 지방 검사 등은 봉기군을 피해 숨어 있었는데도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었고, 한 국회의원은 인민재판에 참가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탈출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로 죽은 사람들보다 정부군 진압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음에도, 이같은 사건의 실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오히려 사실과는 정반대로 보도됐다.
정부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좌익에 의해 죽었으며, 좌익을 ‘살인마’라고 선전했다. 당시 신문들은 정부의 보도자료를 아무런 비판 없이 충실히 지면에 옮겼다. 특히 신문에 실린 사진은 좌익의 주민 학살을 생생하게 전해줘 전 국민이 좌익 만행에 공감할 수 있게 했다. 사건이 진압된 뒤, 여수·순천을 방문했던 문인과 종교인들도 공산주의자들이 참혹한 학살을 자행한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이며, ‘악마’이자 ‘비인간’이라고 주장했다. ‘빨갱이’라는 단어는 정부·언론·문인·종교계의 지식이 총망라돼 형성된 담론의 응결체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빨갱이’라는 낱말에는 이념적 요소가 빠지는 대신 ‘유혈’과 ‘비인간’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각인됐다. 정치적 경쟁자인 ‘공산주의자’로부터 죽여도 좋은 존재인 ‘빨갱이’로의 전환, 빨갱이를 핏빛 어린 폭력적 존재로 형상화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여순 사건이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죽음을 당하더라도 마땅한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반공주의가 압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생산한 여순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는 한 번도 도전받지 않았다. 영화, 사진과 언론, 교과서, 책자 등을 통해 여순 사건에 대한 반공주의적 해석은 60년간 일방적으로 유통되고 반복적으로 재생산됐다.
<광복 30년-여순반란편>(전남일보사·1975)은 좌익 세력이 주민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례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문헌 중 하나이다. 유신체제하에서 발행된 이 책은 “우익에 춤추지 않나 싶을 정도로 우익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으며, 정보 관계자들이 ‘살아 있는 반공 교과서’라고 불렀다.
여순 사건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과 유족들은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왜 자기가 빨갱이로 규정됐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빨갱이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기능을 했는지, 이념적 대립이라고 인식했던 좌우 대립의 밑바탕에는 어떤 정치공학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한국 현대사 연구는 설명하지 못했다.
반공체제 탄생시킨 여순사건
여순 사건은 분단 정부 수립과 국가 건설 과정의 중요한 성격을 드러내주는 ‘감춰진’ 기반이자, 대한민국 반공체제를 탄생시킨 한국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다. 여순 사건은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과 성격,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의 성격, 한국 사회에 그동안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폭력’의 비밀을 드러내준다.
여순 사건의 협력자 색출은 국가 폭력을 통한 ‘편 가르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적으로 규정된 사람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보여주었다. 협력자 색출 과정과 대량 학살은 누가 ‘민족’과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민족 구성원의 자격 심사 과정이었다. 반란군뿐만 아니라 ‘반란 주체들로 간주된 자들=협력자’는 ‘빨갱이’로 간주돼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죽음을 당해야 하는 존재이자 국가 건설에서 뿌리 뽑혀져야 하는 잡초 같은 존재로 취급됐다.
외국의 경우에도 ‘아카’(赤), ‘코미’(commie) 등 공산주의자를 폄하하는 뜻이 내포된 용어들이 있지만, ‘빨갱이’처럼 죽여야 하는 대상, 비인간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빨갱이’라는 용어는 세계 반공주의 역사에서 가장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왜 대한민국은 극단적 반공주의 국가가 되었을까? 분단 정권이라는 약점을 가진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는 두려움, 이에 동조한 대중들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저항 가능성을 봉쇄해야 한다는 압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대중은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극명한 이분법적 인식은 봉기 지역 주민 전체를 적으로 상정하게 했다.
정부 진압군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 모두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여순 사건에서 군경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라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국가 폭력과 숙청은 대중의 저항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제거하는 대중 억압으로 이어졌다. 폭력의 대상은 공식적으로 설정된 외부의 적(공산주의 집단인 북한)이 아니라 내부의 대중으로 확대됐다. 이런 측면에서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를 겨냥하고 있다기보다는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체제가 어느 정도 완성돼 좌익 세력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빨갱이는 계속 만들어졌다.
대중에 대한 폭력으로 시작된 반공주의는 국가보안법 등 법제적 장치와 각종 반관·반민 단체를 중심으로 주민 생활을 구석구석 통제하는 사회 조직화를 통해 점차 모양을 갖춰나갔다. 이제 대한민국 거주자는 ‘반공 국민’으로 탄생됐고, ‘반공 도덕’과 애국심을 가슴 속 깊이 새겨갔다.
어느 사회든 어떤 이념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이런 논의가 활발해지는 만큼 사회는 민주적으로 성숙되며 발전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반공주의는 이념에 따라 형성되지 않았다. 반공주의는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라는 것 외에는 그 안에 어떤 특정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공허한 울림이었고 그 공허함을 강요하기 위해 군경에 의한 노골적인 국가 폭력이 사용됐다. 반공주의는 정치의 핵심을 ‘적’과 ‘아’의 구별로 보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통합보다는 배제의 정치를 구사했다. 그것의 논리적 결말은 대중운동의 억압, 민주적 과정에 대한 무시, 전쟁 불사와 상대편에 대한 파괴와 전멸이었다.
여순 사건에서 최초로 시작된 국가 폭력은 4월 혁명, 1980년 광주민중항쟁 등 한국 현대사에서 주기적으로 그 모습이 재현됐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좌빨’이란 폭력적 언어의 횡행
반공주의의 부정적 유산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민은 여순 사건이라는 국가 폭력의 세례 속에서 태어났고, 폭력의 논리는 정치 과정에 내장됐다. 대한민국 형성 과정에서 폭력에 익숙해지고 몸에 받아들인 국민이 국가 외부에 있다고 간주되는 타자에게 폭력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정치 과정에서 적대와 폭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이 탈바꿈하는 길을 모색하려면 반공주의가 남겨놓은 유산을 곱씹어 살펴봐야 한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좌빨’(좌익 빨갱이)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 우리 편과 적을 선명히 구분하면서 일체의 소통을 외면하는 이 용어는 얼마나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탄생됐는가?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직도 자신의 역사에 대해 무감각하다. 60년 전 여순 사건이 남겨놓은 유산은 아직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글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재직 중이며,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공저로 <죽엄으로써 나라를 지키자>(2007·선인)가 있고, 최근에 <‘빨갱이’의 탄생-여순 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2009·선인)을 출간했다.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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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yingbear 2011.08.20 23:46 -
강생이 2011.08.21 01:14
좋은 글이네요.
아마도 프랑스인 보다는 한국사람이 쓴 것을 게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북한은 일반적인 공산주의에서 많이 벗어난 뒤틀릴 대로 뒤틀린 일당독재나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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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yingbear 2011.08.21 01:47 ohmynews 기자분인데,성명은 알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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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 2011.08.21 02:02 반정부 해도 어차피 빨갱이 인데 전걍 빨갱이 할랍니다.
조부를 죽게한 북한군 이라서 누구보다 싫어하고 김일성 김정일부자와 그 세습권력자들을 싫어하지만
그런다고 반정부가 바뀌진 않을테니 걍 빨갱이 입니다.
정부의 국민억압이 북한 김정일이 하는짓과 같아서 싫어한다고해도
어차피 빨갱이 일수밖엔 없는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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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Note 2011.08.21 02:58 여순반란은 남로당이 일으켰고
남로당 당원으로 군부 총책을 역임한 사람이 박정희인데...
여순반란을 계기로 숙군사업에 발각되어 위기에 처하자 동료들을 까발리고 혼자 살아남은 뒤..
쿠테타 후에는 반공으로 돌변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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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 2011.08.21 15:46 "바닥 빨갱이"의 후임들이 집권세력이자 "반공세력" 이라는건 실로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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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명장 2011.08.21 07:12
좋은 글들이네요
공식적으로 등장했던 시기는 여순반란이였겠지만
그 전에 이미 통용되었다는 생각이
그냥 갑자기 그 단어가 나타나기는 힘들겠지요
일본식민지하에서 활동하다가 미군정에 빌 붙었던 세력들이
사사건건 반대만하는 눈에 가시같았던 독립군들을
미군정장교들 눈에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든 단어가 아닌가
시대에 따라 변질되었다는 생각도
이럴테면 독재군부에 반대하는 세력(이건 말하면 돌 날아오기 딱 좋겠는데요^^)
모든 책임은 군부책임자에게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씀드립니다
서슬이 시퍼런 군부세력에 반대하려면 개인이나 소규모조직으론 좀 힘들지 않겠습니까
군부쿠테타세력에게 저항하려면 적어도 종교세력이 되어야 저항할수가 있지 않았겠나
그렇다고 또 종교세력을 깔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ㅋㅋㅋ
어려울때 기댈세력이 종교세력 외엔 딱히 힘들지 않겠습니까
군부에서 배후세력으로 종교세력을 말하는 순간에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 모든 세력들로
부터 공격받게 되겠지요 그러면 군부지휘자들은 적당한 데땅뜨적인 단어가 필요할 것인데
불순한세력과 이북간첩들 소행이라고 슬쩍 흘리면(일부에선 빨갱이?들이 내려왔나? 이렇게 생각도)종교세력이 내가 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서로 암묵적으로 수면 밑으로 사라지고(내가 지금 소설을 쓰나 ㅋㅋㅋ)
군부지도자는 종교세력을 건들이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할려고당하는 쪽은 이북이랑 전혀 상관도 없는데 빨갱이로 매도 당하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겠고
이 상황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혼란하기만 하겠고 군부세력들은 불교쪽인것 같고
민주화세력들은 장로쪽인것 같고 .... 에이 계속 못하겠네 이만 생략요 ㅋㅋㅋ
즐거운 휴일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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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에 '빨갱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빨갱이-'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동국대가 강정구 교수를 직위해제 했던 지난 8일, 저는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동국대로 향했습니다. 서두르는 모습에 기사아저씨가 자초지정을 물었고 저는 강 교수가 직위해제 돼 취재차 서둘러 가봐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기사아저씨가 뜬금없이 "우리사회엔 빨갱이들이 참 많아, 빨갱이한테서 학생들이 무얼 배우겠어" 하시며 말을 이어가시더군요. 전 적잖이 당혹스러워 아예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제가 <오마이뉴스> 기자라고 했다면 저 또한 빨갱이로 몰렸을 테지요.
빨갱이'였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40년대 이전에 태어났다면 저 또한 빨갱이였을 겁니다. 해방 후 미군정의 조사를 보면 국민의 70%정도가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한반도에선 빨갱이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거지요. 해방 직후 전국에 걸쳐 만들어졌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이 대표적인 예일 겁니다. 좌익 대부분은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또 해방 전후 열악한 상황에서 골고루 잘 살아보자는 사회주의 이론에 매력을 느꼈을 테지요. 이런 점에서 전 빨갱이였을 겁니다.
김구처럼 독립운동가·민족주의자면서 우익인 인사도 다수 있었습니다만, 당시 우익은 대게 친일 경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반공'을 앞세운 미군정의 비호하에서, 탄탄한 민중세력을 지지기반으로 했던 좌익을 잘 견제하며 막대한 권력과 부를 축적했습니다. 민중들은 헐벗는 동안 말이죠. 친일경력의 우익들이 좌익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좌익이 정권을 잡을 경우 자신들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좌익이 정권을 잡으면 반민족·친일 세력을 쓸어버렸을테죠.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 목숨이 위태로워도 독립운동하고 빨갱이 돼서 미국에 미운 털 박혔을 겁니다.
사실 김구는 애매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그리고 극우·보수들이 (여운형과 비교해선진 몰라도) 특히 존경하는 인물 김구. 그는 해방 후 2년 동안은 이승만과 함께 우리나라에 반공주의를 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좌익 민족주의자들은 외면했죠.
하지만 그의 측근-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만-이 이승만에게 테러를 당하고 더불어 자신이 이승만의 정적제거 대상이 됐다고, 한마디로 배신당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어느날 '형'이라 부르던 이승만과 결별하곤 통일을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 가 김일성도 몇 번 만났죠. 현재 우리나라 극우의 잣대로 보면 김구도 '빨갱이 짓'을 몇 번 했던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김구를 '민족주의자'라 떠받들며 존경할까요? 좌익 민족주의자는 핍박하고, 나중엔 극우세력이 존경해 마지않는 이승만까지 괴롭혔는데 말이죠. 알수 없는 정서입니다. 암튼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아시다시피 '신탁통치' 논란에서 중요한 정치적 실수-'신탁통치에 찬성한다'고 한 것-를 저지르는 바람에 좌익은 민족주의자에서 순식간에 매국노로 몰리게 되죠. 여기가 좌익이 그간 유지해왔던 헤게모니를 잃고 헤매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신탁통치가 '통일'이 전제된 것이었음에도 국민들은 오해했습니다. 또 나라 팔아 먹는다고. 소련이 아닌 미국의 제안이었음에도 한 외신과 동아일보가 '소련 안'이라고 오보를 때려버리는 바람에 좌익이 더욱 궁지에 몰렸지요. 암튼 이래저래 좌익은 순식간에 반민족주의자가 됐습니다.
빨갱이만 나쁜 놈은 아닙니다
1947년 제주 4·3 항쟁에서 무고한 주민 수백여명을 처참하게 죽이며 이승만과 미군이 내세운게 빨갱이 사냥이었습니다. 빨갱이가 나쁜 놈인지, 자기 권력에 해를 끼치는 골칫덩이들을 빨갱이라 부르며 죽인게 나쁜 놈인지.
빨갱이가 한국전쟁 때 인간으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며 증오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국군과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현재 속속들이 그 내막이 밝혀지고 있습니다(국민보도연맹, 거창양민학살, 노근리 등등). 빨갱이도 사람을 무참히 죽였지만 빨갱이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사람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비판하려면 모두 다 하셔야 합니다.
16일 MBC <100분 토론> '열린우리당 의장경선 합동토론'에 참석했던 김혁규 후보는 "강정구 교수의 직위해제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나"는 질문에 "6·25는 '북에서 남침'한 전쟁이고 '통일전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됐기에 학자로서 말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며 "국민들이 상당한 혼란을 가져왔기에 '직위해제'가 옳다"고 주장했더군요. 학문과 사상의 자유, 직위해제 절차의 문제 등을 운운하기에 앞서 '북에서 남침한 전쟁'이란 대목에 대해 좀 따져 묻고 싶습니다.
한국전쟁은 빨갱이가 먼저 총을 쏨으로써 시작했을 지 모르지만 전쟁 이전 친일·반민족주의자를 쓸어내지 못하고 토지개혁을 이루지 못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했던 남쪽 우익들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50년대 들어서며 전쟁을 차근차근 준비해왔던 북한에도 분명 잘못이 있죠. 균형잡힌 시각으로 봐야한다는 겁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을 말해보라면 '노예제도, 남북의 경제차' 등등 구조적인 문제를 운운하시는 분들이 한국전쟁의 원인을 말해보라면 '북한이 먼저 밀고 들어왔다'며 단순히 사건사적 원인을 말하는 사람들, 왜 이중잣대를 적용하시는지.
빨갱이라 북한 인권을 주장합니다(미국식 주장은 반대합니다)
여기저기서 배운 역사들을 체계없이 주절주절 말씀드렸습니다만 결론은 '난 빨갱이였을 것이다' 입니다. 아니, 어쩜 '공산주의자=빨갱이'라면 현재 빨갱이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택시기사 아저씨가 '친북=빨갱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전 빨갱이가 아닙니다. 전 김정일을 매우 싫어하고 현 대북정책에도 찬성하지 않으니깐요. 40, 50년대엔 북한에 빨갱이가 많았을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김정일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을 억압하고 있고, 남한은 외교적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북한 민중의 삶은 외면한 채 북한 정부에 퍼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퍼주기를 할 망정 조건은 좀 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인 이득을 안겨주면서 정치적인 민주화를 조금씩 이루게 하면 안될까요. 민주화는 아니더라도 모든 북한 사람들이 제때 쌀밥 먹는 것이나 좀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1년 동안 새터민(탈북)청소년 멘토 활동을 할 때 배운 것에서나 학교에서 보다 객관적 자료를 통해 배운 것에서나 어쨌든 제가 내린 결론은 현 북한 민중들은 인간 이하의 헐벗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는 겁니다. 재중(中)탈북자들의 인권유린 실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돕니다.
전 빨갱이(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북한 인권 개선을 주장합니다. 진정한 맑스·공산주의자라면 개개인의 삶이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에 탄압받는 일을 외면해선 안되니깐요.
결국 전 빨갱이였을 것이고 지금도 빨갱이=공산주의자입니다. 친북은 아니구요. 그 택시기사 아저씨를 비롯한 우리사회에 '빨갱이가 많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일성·김정일은 빨갱이가 아닙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단지 권력에 목메다는 우매한 지도자일 뿐입니다. 아울러 북한도 공산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독재·전제주의 국가죠. 더불어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빨갱이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딱히 강정구 선생님도 진정한 빨갱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인권 개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더군요. 인권은 그 나라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빨갱이'란 말을 쓰실 때 친북과 김일성·김정일과는 좀 분리해서 써 주십시오. 그리고 공산주의 자체가 나쁘다고 몰아붙이는 분들. 민주주의 사회에선 사상의 자유가 있습니다. 현재 남북 분단의 상황 아래선 다르다구요? 글쎄요. 북한은 공산주의국가가 아니라는 걸 거듭 말씀드리고 싶네요. 유럽에선 200~300년 전부터 지식인들이 인정한 '사상의 자유'입니다. 그렇게 괄시하시는 '쪽바리' 일본에도 공산당이 있습니다. 존심 상하지도 않나요.
글 창고에서 좋은글이 있어 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