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시의 자살 단상
2017.09.06 01:40
0시의
자살 단상
12시가 넘었다.
벌써 어제의 일이다.
자살에는 의도적 자살과 즉흥적 자살이 있다.
이 둘 다 선행적 연습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살에는 의식적이든 비의식적이든 필연이라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의도적 자살은 자살 장치를 마련하고
자살을 위한 절차적 의식이 치루어진다.
즉흥적 자살은 자극에 의한 순간적 판단이지만
그들 속에는 연습 된 필연의 의식 세계가 있다.
연습을 하시오.
그러면 언젠가 그 희망이 당신에게도 소리 없이 찾아올 것이다.
이 0시에,
마광수 선생의 의식 세계를 따라가 본다.
고독을 이기는 방법 - 마광수
고독을 이겨나가려면 우선 '사랑'에 대한 헛된 꿈을 버려야 한다.
완전한 사랑도 없고 남녀간의 완벽한 궁합도 없고
진짜 오르가즘도 없다.
'오르가즘'이란 말은 의사들이 만들어낸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사랑의 기쁨에 들떠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자.
미혼의 남녀라면 기혼자들이 떠벌여대는
남편(또는 아내)자랑이나 자식자랑에 속지 말고,
기혼남녀라면 남들의 가정생활과 자기의 가정생활을 비교하지 말자.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요 허풍쟁이이다.
다 불쌍한 '자기 변명꾼'들이다. 믿을 사람은 오직 자기밖에 없다.
물론 혼자서 살아나가려면 뼈아픈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혼자들이 고독을 덜 느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결혼하든 결혼 안하든,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르시시즘적 자위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두라는 말이다.
취미생활이나 일로 고독을 풀어도 좋고
그냥 가만히 앉아 시간을 때워나가도 좋다.
이래도 외롭고 저래도 외롭다.
그때 그때 슬피 울어 고독을 달래도 좋고
술에 취하여 허망스레 웃어도 좋다.
요컨대 '완전한 사랑'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희망'을 갖기보다는 '절망'을 택하라는 말이다.
희망은 절망보다 더 무섭다. 과도한 희망은
과도한 절망을 불러들이기 쉽다.
절대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연애하고 싶으면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라.
자식을 낳고 싶으면 낳고 낳기 싫으면 낳지 말라.
사회명사들이 잘난척 하며 써 갈기는 '행복론' 따위는
읽기도 전에 찢어버려라. 다들 자기변명이요 대리배설일뿐,
믿을만한 '고독의 근치(根治)처방'은 없다.
그것은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신(神)의 사랑도 믿지 말라.
정 외롭거든 술이나 담배를
자학적으로 마시고 피우며 시간을 달래나가라.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자살해도 좋고,
바람을 피울 용기가 있으면 바람을 피워도 좋다.
아무튼 뻔뻔스럽게 운명 아니 신(神)의 '심술'과 맞서나가야 한다.
'고독'이란 결국 '의타심(依他心)'에서 온다.
의타심을 완전히 버릴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독으로부터
당당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절대로 '밑지는 사랑'을 하지 말라.
사랑을 하려거든 이기적인 자세로 빼앗는 사랑만 하라.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인의 명복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