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장성택 일가 몰살..
2014.01.26 17:31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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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마을 2014.01.2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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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사는자 2014.01.26 17:59
천하의 잡놈... 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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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그림자 2014.01.26 20:37
어느 시대건 역적과 충신은 백지한장 차이로 갈리기 마련입니다.
그쪽에서 잡놈이면 보는 시각의 차이로 이쪽에선 위대한 충신일수 있는데,
잡놈이라 한다면 순전히 그쪽 시각으로 보는건데 그보다는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개혁가 정도로 보시는게 어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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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주의보 2014.01.26 20:55 잡놈의 시각이 문제요...
너는 잡놈.. 나는 깨끗한놈?
강아지 붕알을 까보셨오.. 붕알은 붕알인거요...
미안하다 하면 되는거... 제길...
누구 먼저 죽는지 함 내기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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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주의보 2014.01.26 18:02 남의 일은 아닌듯...
왜 여기도 잡놈 취급하며...
결국은 누구 누르고.. ㅋ... 말한번 올리고 싶어서...
그냥 올려라... 누구 뭐라 않한다. ㅉ
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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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다 2014.01.27 02:37
여기도 온동네 휘젓는 잡놈이 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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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59 2014.01.27 04:00
장성택 숙청의 전말
⊙ 장성택 숙청은 北 전형적 권력투쟁 결과물… ‘왕당파’ 독주체제 전망
⊙ 국정원의 張 실각정보 공개 직전, 중국은 김정은 비자금 동결, 푸틴은 對北 제재 철저 이행 지시
⊙ 김정은 비자금 수십억 달러 추산, 중국의 계좌 동결로 내부 통치에 상당한 타격 받을 것
⊙ 김경희 예상 수명 1년 남짓, 유일사상 10대 원칙 개정 직접 주도
2013년 12월 9일 북한 조선중앙TV는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의 체포 장면을 공개했다. (조선중앙TV)
장성택(張成澤)이 처형당했다. 2013년 12월 3일 국정원이 ‘장성택 실각’ 정보를 공개하자 북한 조선노동당과 《조선중앙TV》는 12월 9일 장성택의 체포 장면을 공개하며 숙청을 공식화했다. 이른바 ‘1호 사진’에서 그의 얼굴이 사라졌고, 북한 전(全) 주민은 반향문(소감문)을 써야 했다.
12월 13일 《조선중앙통신》은 “장성택이 특별군사재판 후 즉각 처형됐다”고 보도했다. 김정은(金正恩)의 고모와 결혼한 1972년부터 40년 이상 권력 핵심이었던 그의 숙청으로 북한 권력 구도에 큰 변화가 올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공식 등장 이전인 2010년 6월 사망한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생전에 김정은과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한 모습. (조선중앙TV)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모두 면담한 장성택은 황금평·위화도 특구와 나선(나진·선봉) 특구 등 경협에 추가 합의했다. 2011년 김정일 방중을 계기로 본격화한 후 자신이 진두지휘해 온 사업이었다. 하지만 당 조직지도부의 방해로 사업은 계속 지지부진했다.
중국 정보에 정통한 한 관계자에 따르면, 대북 경협 이행을 위해 방북(訪北)한 중국 실무진이 협의 후 후속조치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장성택 숙청으로 북한 내 최고 실세로 떠오른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조선중앙TV)
[월간조선]
"황장엽 망명 무렵 장성택도 측근 통해 남측과 접촉했다"
장성택의 行路
⊙ 황장엽이 1996년 말 김용순과 장성택 두 북한 최고위층 대리인 남측에 소개
⊙ '황장엽 망명' 공작 참여했던 당시 안기부도 김용순, 장성택 접촉
북한이 이례적으로 공개한 포승줄에 양 손이 묶인 장성택이 국가안전보위부원들에게 붙들린 채 법정에 선 모습. 2013년 12월 12일 열린 특별군사재판 후 장성택은 국가전복음모행위로 사형을 당했다.
《월간조선》은 2013년 6월호 제작 당시 장성택의 운명에 또 다른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를 기사를 준비했었다. 장성택이 남한으로의 망명을 준비하고 있던 황장엽(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의 소개로 1996년 말 남측과 접촉했었다는 내용을 취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월간조선》은 편집진의 토론을 거쳐 장성택 기사를 게재하지 않았다. 이유는 장성택이 그나마 북한에서 언젠가는 개혁과 개방을 선도할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북한 내부의 강경파 견제 등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서 필요한 인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 이상설이 끊이지 않았던 부인 김경희보다 먼저 죽었다. 만약 《월간조선》이 2013년 6월호를 통해 장성택 기사를 게재했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살아남기 위해 방어책을 마련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이번처럼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길은 피하지 않았을까.
2013년 12월 9일 북한 조선중앙TV는 장성택이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체포되는 모습을 공개했다.
당시 《월간조선》이 준비했던 기사를 2014년 신년호를 통해 전재(全載)한다.
《월간조선》은 2013년 5월호에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의 망명 비화(?話)를 소개하면서 황 전 비서 망명 직전 남측이 황 전 비서 외에도 당시 북한 최고위층 인사 2명과도 접촉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2003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용순 전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였고 또 다른 1명은 당시 북한의 현직 최고위층이라고 밝혔다.
이 사실이 보도된 후 북한의 현직 최고위층이라는 또 다른 1명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의가 계속 이어졌었다. 항간에는 이미 그 인사의 이름을 특정해 '그 또 다른 누구는 000'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개중에는 《월간조선》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그 북한 최고위층 인사의 이름과 일치하는 실명을 거론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황장엽 망명' 사건을 특종 보도했던 김용삼(金容三) 전 《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 5월호에서 황장엽 망명 직전 또 다른 북한 고위 인사와의 접촉이 있었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황 선생이 김덕홍씨를 통해 96년 말에 북한 최고위층 두 사람의 대리인을 이 회장(당시 황장엽 망명 사건에 직접 관여했던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을 지칭)에게 소개해 준 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 이름을 밝힐 수 있고 한 사람은 북한의 최고위층 인사로 아직 생존해 있어서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합니다. 죽은 사람은 2003년 6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평양에서 사망한 김용순 대남(對南)담당 비서입니다."
그러면서 김용삼 기자는 황장엽 망명 당시 공개하지 않았던 '골동품 고증자료'라는 문건을 보여주었다. 김 기자가 말한 북한 최고위층의 대리인이 자금 마련을 위해서 그 골동품의 값어치를 알아봐 달라며 보내온 문건이었다. 이어지는 김 기자의 말이다.
"당시 국정원은 황 선생이 북한 고위층 두 사람을 이연길 회장에게 소개시켜 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골동품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죠. 따라서 우리 정보기관이 바보가 아니라면 황 선생이 한국으로 망명을 한 이후에도 이 라인을 관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장성택을 접촉한 기업인
김용삼 기자의 주장대로라면 국정원도 두 사람의 신원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월간조선》은 후속 취재를 위해 국정원에 다음과 같은 질의서를 보냈다.
<-1997년 2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무렵 귀원이 황 비서 외 김용순과 (현직 북한 최고위층 인사인) 000을 접촉한 사실이 있는지요.
-접촉했다면 그 시기가 1997년 말 무렵이 맞는지요.
-접촉이 있었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요.>
국정원의 공식 답변은 "아는 바가 없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월간조선》은 1997년 당시 관련 부서의 고위 간부로 있던 전직 국정원 직원에게 같은 내용의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런 답변을 주었다.
"그 무렵 남한에서 000을 잘 알고 교류했던 인물은 남한에서 모 재벌기업 임원과 또 다른 기업 인사가 있다. 정보기관은 그들을 통해서 000을 접촉한 것으로 알고 있다. 000은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다. 그는 남북 간의 전쟁을 반대하는 인물이다. 000은 남한과 비교적 말이 통하는 인물이었다. 김정은이 000을 제거한다면 통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북한에 상당한 혼란이 올 것이다. 김정은은 000이 과거 어떤 일을 했든 그가 필요할 것이다."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가 언급한 두 기업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기업인은 "북한 000을 1997년 전후에 접촉한 사실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같은 질문에 또 다른 기업인은 이렇게 말했다.
"대답하기 곤란하다. 나는 000의 성격을 잘 안다. 화통하다. 북한 내에서 남한과 말이 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지금은 그와의 접촉이 끊겼다. 북한 안에는 아주 나쁜 세력들이 있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000 같은 사람은 보호해야 한다."
000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뜻이었다.
황장엽 망명 당시 남측이 접촉한 김용순 외 또 다른 최고위층이 누군가를 후속 취재하는 동안 언론계 출신으로 북한 정보에 밝은 한 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월간조선》이 5월호에서 보도한 북한 현직 최고위층 인사는 000 맞지요?" 하고 물었다. "000인 걸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000의 그동안 행적을 보면 아는 것 아닌가. 나도 《월간조선》에 보도가 나가기 전부터 정보기관 관계자로부터 그 인사가 누구인지 오래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월간조선》은 황장엽 망명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김용삼 기자에게 황장엽 망명 무렵 접촉했던 북한 고위 인사 중 김용순 외 다른 한 명의 실명을 밝히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김 기자는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 건 곤란하지 않으냐. 때가 되면 내가 밝히겠다"며 남측이 접촉했던 북측 인사 실명 공개에 난색을 표했다. 《월간조선》은 확인 취재 과정에서 정보기관 관계자 등을 통해서 이미 000의 실체를 파악해 놓고 있었다. 다시 김용삼 기자에게 물었다.
-어찌됐든 황장엽 선생 망명 무렵 남측과 접촉했다는 김용순 외 또 다른 북한 고위층 인사가 000은 맞는 것 아닌가.
"그건 맞다."
1997년 당시 정보기관이 두 기업인을 통해서 북한 000과 접촉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려준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당시 000을 안기부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안기부 내에서도 극소수였다. 그때 000 접촉 사실을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안기부가 그 당시 000 측과 접촉했던 것은 맞는 것 같다"고 전해왔다.
2013년 12월 8일 열린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김정은.000은 장성택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황장엽 망명 무렵 남측이 접촉했다는 북한 최고위 인사 000의 실명은 장성택이다. 그의 직책은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다. 그는 알려진 대로 김정일의 유일한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이다. 김정은에게는 고모부인 것이다. 그는 2011년 12월 김정일의 사망 후 김정은의 후견인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사후(死後) 북한 권부에서는 김경희, 장성택을 중심으로 한 친가(親家)세력과 리영호, 김격식 등으로 대표되는 군부 강경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이 권력투쟁의 승리자는 장성택이었다.
장성택은 북한 군부 장악을 위해 2012년 4월 11일 당시 자신의 측근으로 알려진 최룡해를 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앉혔다. 군 인사를 총괄하는 최룡해는 1980년대부터 장성택과 인연을 맺어 왔으며 반당 행위로 숙청 위기에 놓였을 때 장성택이 구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2012년 7월에는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을 숙청하는 데 성공한다. 김정은의 스승이었고 인민군 야전 최고 사령관인 총참모장을 숙청한 것은 김정은과 장성택, 최룡해의 북한군 장악의 완결편으로도 읽혔다.
북한개혁방송 김승철 대표는 리영호 숙청 사건에 대해 "북한 정권 67년 만에 절대권력이 사라졌음을 증명해 준 사건"이라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북한이 김정은 개인의 절대권력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성택, 김경희 등에 의해 권력 분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군부 강경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2012년 말과 2013년 초로 이어진 북한의 은하3호 미사일 발사와 3차 핵실험 강행은 리영호 숙청 이후에도 김격식, 김영철 등으로 대표되는 북한 내 군부 강경세력의 힘이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장성택이 핵실험 등을 반대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다 북한 권력 힘의 균형추는 다시 장성택에게 기운 것으로 보인다. 군부 강경파인 인민무력부장(국방장관에 해당) 김격식이 장성택의 측근으로 알려진 장정남으로 지난 5월 교체됐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직전에는 김정은의 서기실장으로 김창선이 임명되는 일도 있었다. 서기실장은 우리의 비서실장 격으로 그 역시 장성택의 측근으로 알려졌다. 장성택의 북한 내에서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들이었다.
장성택의 힘
장성택 숙청에 대한 북한 내 반응을 소개하며 《노동신문》이 게재한 사진.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 노동자들이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모습이다.
장성택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김정은은 지난해 1월 당의 주요 간부들에게 장성택을 "누구보다 가까운 혁명동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국가원수들이 묵는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 머물며 국빈급 대접을 받았다. 장성택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들이다. 그가 가진 힘의 원천이 그가 김정일의 유일한 혈육인 김경희의 남편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46년 강원도 천내군(함북 청진시라는 설도 있음)에서 태어난 장성택과 김일성의 장녀 김경희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함께 다니던 중 만났다. 두 사람은 김일성이 환갑을 맞이한 1972년에 결혼했다. 그해 당중앙위원회의 지도원에 임명된 장성택은 만 40세의 젊은 나이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46세 때인 1992년 12월에는 북한의 핵심 파워 엘리트 그룹인 당중앙위원회 위원이 된다. 1995년에는 노동당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권력 핵심에 진입했다.
승승장구하던 장성택은 2003년 10월 '김정일의 당 총비서 추대 6주년 중앙보고대회'에 참석한 이후 공개석상에서 사라진다. 당시 우리 정보기관은 장성택이 종파행위와 권력남용 혐의로 당으로부터 집중 검열을 받으며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장성택이 공개석상에서 사라진 시기는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 선생이 2003년 7월 4일 국회 공개 청문회에 나와,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 김정남하고는 대비가 된다"고 발언한 지 얼마 안 돼서다. 황 선생은 이 자리에서 "장성택의 큰형(장성우)이 수도방위도 맡는 3군단장이고 작은형(장성길)은 군단장급인데다, 자신은 노동당 조직지도부 1부부장으로 사방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았다"며 "장성택은 지금 사실상 북한의 제2인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부인이자 김정은의 생모(生母)인 고영희가 2004년 유선암으로 사망한 이후인 2006년 1월 28일 국방위원회가 주최한 설 연회에 김정일과 함께 참석하면서 공식석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2007년에는 조직지도부의 행정 담당 제1부부장으로 공식석상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업무를 다시 맡았다. 장성택은 2009년 초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보답인지 김정은 체제라는 3대 세습 체제가 등장하면서 그는 북한 내에서 김정은을 제외하면 가장 큰 권력을 움켜쥔 권력 핵심인물이 되었다.
장성택의 성격은 어떤가. 북한 전문가인 이명산씨는 그의 성격을 이렇게 전한다.
"북한의 어느 관리보다도 검열관 자격으로 해외여행을 많이 했으며 서방세계의 물정에 밝은 엘리트 중 엘리트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양주 한 병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시는 애주가이며 부하직원의 마누라를 포함해 반반한 여자를 보면 일을 끝내버리는 오입쟁이이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며 호방한 외향성 성격의 사내다. 일부 분석가들이 북한에 혼란이 폭발할 때는 당과 군부의 충돌로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장성택은 당과 군부 양쪽에 모두 신경세포조직이 있기 때문에 그런 혼란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성택은 남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어지는 이명산씨의 이야기다.
"2002년 10월 박남기 북한계획위원회 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18명의 남한경제시찰단이 남한에 왔을 때 장성택도 함께 왔다. 실제 시찰단의 우두머리는 장성택이었던 셈이다. 그는 남한에 8박9일 머무르는 동안 지하철, 고속철을 타보고 삼성전자, LG전자, 포항제철소, 현대자동차 등을 들러보았다. 그는 남한 각지의 놀랍고도 경이로운 경제발전 상황과 첨단 기술을 직접 목도하고는 잠을 설쳤다고 한다. 연회석상에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한숨만 내쉬며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 남북의 체제와 경제를 비교할 때 장성택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충격이 한숨과 술로 나타났던 것이다."
김용순과 장성택의 교통사고는 우연?
북한 관련 인터넷 사이트가 공개한 김일성 가족 사진. 김일성(가운데)과 김정일(왼쪽),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오른쪽). 1966년에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의 장녀와 결혼하면서 젊은 나이에 북한 권력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장성택의 부침 과정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교통사고다. 2006년 북한 권력 무대에 복귀한 장성택은 그해 9월 평양 모란봉 구역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장성택이 타고 있던 S600벤츠 승용차를 북한군 트럭이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였다. 그가 타고 있던 승용차가 폐차될 정도로 큰 교통사고였다. 장성택의 둘째형으로 인민군 중장이었던 장성길이 그해 7월에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발생한 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평양에서는 장성택에 대한 암살시도가 있었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장성택의 교통사고에 주목한 이유는 황장엽 선생 망명 직전 남측이 접촉했다는 또 다른 북측 고위 인사 김용순도 2003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였던 김용순은 그해 6월 16일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 입원치료를 받아오다 4개월여 만인 10월 26일 사망했다. 김정일의 외가 쪽 친척으로 알려진 김용순은 통일전선부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북한에서 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실세 중 실세였던 인물이다. 정적(政敵)을 교통사고로 가장해 처리하는 일은 독재국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에 김용순의 당시 교통사고 후 사망 사건도 많은 의혹이 제기됐었다.
거꾸로 장성택이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리제강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교통사고를 가장해 암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일도 있었다. 리제강은 2010년 6월 2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정규뉴스 시간에 이 사실을 알렸다. 리제강 사후 5일 뒤 장성택은 당시 김정일이 위원장인 국방위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정치적 라이벌의 교통사고 사에 이어 그 라이벌이었던 장성택의 승진이 발표되면서 장성택에 의한 리제강 암살설이 제기됐던 것이다.
이제 궁금해지는 것은 장성택의 미래다. 최근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부 강경파이자 장성택 견제파였던 김격식의 퇴진 등 일련의 움직임들을 볼 때 장성택은 김정은 체제하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당과 군은 물론이고 김정은조차 그를 어쩌지 못할 힘을 이미 갖고 있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있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문제는 그의 권력이 치마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김일성의 사위, 김정일의 매제라는 후천적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에 의해서 그의 권력이 최초 잉태됐다는 점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를 들어 한 북한 문제 전문가는 "김경희가 소멸된다면 장성택의 권력도 소멸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희의 건강 이상설이 나돌고 있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하기 직전 북한에 가서 장성택과 김경희를 만났다는 한 교포 대북 사업가는 "김경희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얼굴이 검은 게 간이 많이 나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사업가는 또 "그녀의 병은 체질 자체를 바꿔야 나을 수 있는 병"이라면서 "남한에 간암환자까지 고친 전문가를 찾아서 소개하려고 했는데 성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여자로 인해 생성된 권력이 여자로 인해 소멸될지도 모를 일이다.
⊙ 장성택 숙청은 北 전형적 권력투쟁 결과물… ‘왕당파’ 독주체제 전망
⊙ 국정원의 張 실각정보 공개 직전, 중국은 김정은 비자금 동결, 푸틴은 對北 제재 철저 이행 지시
⊙ 김정은 비자금 수십억 달러 추산, 중국의 계좌 동결로 내부 통치에 상당한 타격 받을 것
⊙ 김경희 예상 수명 1년 남짓, 유일사상 10대 원칙 개정 직접 주도
2013년 12월 9일 북한 조선중앙TV는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의 체포 장면을 공개했다. (조선중앙TV)
장성택(張成澤)이 처형당했다. 2013년 12월 3일 국정원이 ‘장성택 실각’ 정보를 공개하자 북한 조선노동당과 《조선중앙TV》는 12월 9일 장성택의 체포 장면을 공개하며 숙청을 공식화했다. 이른바 ‘1호 사진’에서 그의 얼굴이 사라졌고, 북한 전(全) 주민은 반향문(소감문)을 써야 했다.
12월 13일 《조선중앙통신》은 “장성택이 특별군사재판 후 즉각 처형됐다”고 보도했다. 김정은(金正恩)의 고모와 결혼한 1972년부터 40년 이상 권력 핵심이었던 그의 숙청으로 북한 권력 구도에 큰 변화가 올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공식 등장 이전인 2010년 6월 사망한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생전에 김정은과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한 모습. (조선중앙TV)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모두 면담한 장성택은 황금평·위화도 특구와 나선(나진·선봉) 특구 등 경협에 추가 합의했다. 2011년 김정일 방중을 계기로 본격화한 후 자신이 진두지휘해 온 사업이었다. 하지만 당 조직지도부의 방해로 사업은 계속 지지부진했다.
중국 정보에 정통한 한 관계자에 따르면, 대북 경협 이행을 위해 방북(訪北)한 중국 실무진이 협의 후 후속조치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장성택 숙청으로 북한 내 최고 실세로 떠오른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조선중앙TV)
[월간조선]
"황장엽 망명 무렵 장성택도 측근 통해 남측과 접촉했다"
장성택의 行路
⊙ 황장엽이 1996년 말 김용순과 장성택 두 북한 최고위층 대리인 남측에 소개
⊙ '황장엽 망명' 공작 참여했던 당시 안기부도 김용순, 장성택 접촉
북한이 이례적으로 공개한 포승줄에 양 손이 묶인 장성택이 국가안전보위부원들에게 붙들린 채 법정에 선 모습. 2013년 12월 12일 열린 특별군사재판 후 장성택은 국가전복음모행위로 사형을 당했다.
《월간조선》은 2013년 6월호 제작 당시 장성택의 운명에 또 다른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를 기사를 준비했었다. 장성택이 남한으로의 망명을 준비하고 있던 황장엽(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의 소개로 1996년 말 남측과 접촉했었다는 내용을 취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월간조선》은 편집진의 토론을 거쳐 장성택 기사를 게재하지 않았다. 이유는 장성택이 그나마 북한에서 언젠가는 개혁과 개방을 선도할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북한 내부의 강경파 견제 등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서 필요한 인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 이상설이 끊이지 않았던 부인 김경희보다 먼저 죽었다. 만약 《월간조선》이 2013년 6월호를 통해 장성택 기사를 게재했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살아남기 위해 방어책을 마련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이번처럼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길은 피하지 않았을까.
2013년 12월 9일 북한 조선중앙TV는 장성택이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체포되는 모습을 공개했다.
당시 《월간조선》이 준비했던 기사를 2014년 신년호를 통해 전재(全載)한다.
《월간조선》은 2013년 5월호에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의 망명 비화(?話)를 소개하면서 황 전 비서 망명 직전 남측이 황 전 비서 외에도 당시 북한 최고위층 인사 2명과도 접촉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2003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용순 전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였고 또 다른 1명은 당시 북한의 현직 최고위층이라고 밝혔다.
이 사실이 보도된 후 북한의 현직 최고위층이라는 또 다른 1명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의가 계속 이어졌었다. 항간에는 이미 그 인사의 이름을 특정해 '그 또 다른 누구는 000'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개중에는 《월간조선》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그 북한 최고위층 인사의 이름과 일치하는 실명을 거론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황장엽 망명' 사건을 특종 보도했던 김용삼(金容三) 전 《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 5월호에서 황장엽 망명 직전 또 다른 북한 고위 인사와의 접촉이 있었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황 선생이 김덕홍씨를 통해 96년 말에 북한 최고위층 두 사람의 대리인을 이 회장(당시 황장엽 망명 사건에 직접 관여했던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을 지칭)에게 소개해 준 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까 이름을 밝힐 수 있고 한 사람은 북한의 최고위층 인사로 아직 생존해 있어서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합니다. 죽은 사람은 2003년 6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평양에서 사망한 김용순 대남(對南)담당 비서입니다."
그러면서 김용삼 기자는 황장엽 망명 당시 공개하지 않았던 '골동품 고증자료'라는 문건을 보여주었다. 김 기자가 말한 북한 최고위층의 대리인이 자금 마련을 위해서 그 골동품의 값어치를 알아봐 달라며 보내온 문건이었다. 이어지는 김 기자의 말이다.
"당시 국정원은 황 선생이 북한 고위층 두 사람을 이연길 회장에게 소개시켜 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골동품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죠. 따라서 우리 정보기관이 바보가 아니라면 황 선생이 한국으로 망명을 한 이후에도 이 라인을 관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장성택을 접촉한 기업인
김용삼 기자의 주장대로라면 국정원도 두 사람의 신원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월간조선》은 후속 취재를 위해 국정원에 다음과 같은 질의서를 보냈다.
<-1997년 2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 무렵 귀원이 황 비서 외 김용순과 (현직 북한 최고위층 인사인) 000을 접촉한 사실이 있는지요.
-접촉했다면 그 시기가 1997년 말 무렵이 맞는지요.
-접촉이 있었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요.>
국정원의 공식 답변은 "아는 바가 없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월간조선》은 1997년 당시 관련 부서의 고위 간부로 있던 전직 국정원 직원에게 같은 내용의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런 답변을 주었다.
"그 무렵 남한에서 000을 잘 알고 교류했던 인물은 남한에서 모 재벌기업 임원과 또 다른 기업 인사가 있다. 정보기관은 그들을 통해서 000을 접촉한 것으로 알고 있다. 000은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다. 그는 남북 간의 전쟁을 반대하는 인물이다. 000은 남한과 비교적 말이 통하는 인물이었다. 김정은이 000을 제거한다면 통치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북한에 상당한 혼란이 올 것이다. 김정은은 000이 과거 어떤 일을 했든 그가 필요할 것이다."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가 언급한 두 기업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기업인은 "북한 000을 1997년 전후에 접촉한 사실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같은 질문에 또 다른 기업인은 이렇게 말했다.
"대답하기 곤란하다. 나는 000의 성격을 잘 안다. 화통하다. 북한 내에서 남한과 말이 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지금은 그와의 접촉이 끊겼다. 북한 안에는 아주 나쁜 세력들이 있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000 같은 사람은 보호해야 한다."
000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뜻이었다.
황장엽 망명 당시 남측이 접촉한 김용순 외 또 다른 최고위층이 누군가를 후속 취재하는 동안 언론계 출신으로 북한 정보에 밝은 한 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월간조선》이 5월호에서 보도한 북한 현직 최고위층 인사는 000 맞지요?" 하고 물었다. "000인 걸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000의 그동안 행적을 보면 아는 것 아닌가. 나도 《월간조선》에 보도가 나가기 전부터 정보기관 관계자로부터 그 인사가 누구인지 오래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월간조선》은 황장엽 망명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김용삼 기자에게 황장엽 망명 무렵 접촉했던 북한 고위 인사 중 김용순 외 다른 한 명의 실명을 밝히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김 기자는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 건 곤란하지 않으냐. 때가 되면 내가 밝히겠다"며 남측이 접촉했던 북측 인사 실명 공개에 난색을 표했다. 《월간조선》은 확인 취재 과정에서 정보기관 관계자 등을 통해서 이미 000의 실체를 파악해 놓고 있었다. 다시 김용삼 기자에게 물었다.
-어찌됐든 황장엽 선생 망명 무렵 남측과 접촉했다는 김용순 외 또 다른 북한 고위층 인사가 000은 맞는 것 아닌가.
"그건 맞다."
1997년 당시 정보기관이 두 기업인을 통해서 북한 000과 접촉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려준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당시 000을 안기부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안기부 내에서도 극소수였다. 그때 000 접촉 사실을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안기부가 그 당시 000 측과 접촉했던 것은 맞는 것 같다"고 전해왔다.
2013년 12월 8일 열린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김정은.000은 장성택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황장엽 망명 무렵 남측이 접촉했다는 북한 최고위 인사 000의 실명은 장성택이다. 그의 직책은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다. 그는 알려진 대로 김정일의 유일한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이다. 김정은에게는 고모부인 것이다. 그는 2011년 12월 김정일의 사망 후 김정은의 후견인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사후(死後) 북한 권부에서는 김경희, 장성택을 중심으로 한 친가(親家)세력과 리영호, 김격식 등으로 대표되는 군부 강경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이 권력투쟁의 승리자는 장성택이었다.
장성택은 북한 군부 장악을 위해 2012년 4월 11일 당시 자신의 측근으로 알려진 최룡해를 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앉혔다. 군 인사를 총괄하는 최룡해는 1980년대부터 장성택과 인연을 맺어 왔으며 반당 행위로 숙청 위기에 놓였을 때 장성택이 구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2012년 7월에는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을 숙청하는 데 성공한다. 김정은의 스승이었고 인민군 야전 최고 사령관인 총참모장을 숙청한 것은 김정은과 장성택, 최룡해의 북한군 장악의 완결편으로도 읽혔다.
북한개혁방송 김승철 대표는 리영호 숙청 사건에 대해 "북한 정권 67년 만에 절대권력이 사라졌음을 증명해 준 사건"이라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북한이 김정은 개인의 절대권력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성택, 김경희 등에 의해 권력 분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군부 강경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2012년 말과 2013년 초로 이어진 북한의 은하3호 미사일 발사와 3차 핵실험 강행은 리영호 숙청 이후에도 김격식, 김영철 등으로 대표되는 북한 내 군부 강경세력의 힘이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장성택이 핵실험 등을 반대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다 북한 권력 힘의 균형추는 다시 장성택에게 기운 것으로 보인다. 군부 강경파인 인민무력부장(국방장관에 해당) 김격식이 장성택의 측근으로 알려진 장정남으로 지난 5월 교체됐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직전에는 김정은의 서기실장으로 김창선이 임명되는 일도 있었다. 서기실장은 우리의 비서실장 격으로 그 역시 장성택의 측근으로 알려졌다. 장성택의 북한 내에서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들이었다.
장성택의 힘
장성택 숙청에 대한 북한 내 반응을 소개하며 《노동신문》이 게재한 사진.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 노동자들이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모습이다.
장성택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김정은은 지난해 1월 당의 주요 간부들에게 장성택을 "누구보다 가까운 혁명동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국가원수들이 묵는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 머물며 국빈급 대접을 받았다. 장성택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들이다. 그가 가진 힘의 원천이 그가 김정일의 유일한 혈육인 김경희의 남편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46년 강원도 천내군(함북 청진시라는 설도 있음)에서 태어난 장성택과 김일성의 장녀 김경희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함께 다니던 중 만났다. 두 사람은 김일성이 환갑을 맞이한 1972년에 결혼했다. 그해 당중앙위원회의 지도원에 임명된 장성택은 만 40세의 젊은 나이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46세 때인 1992년 12월에는 북한의 핵심 파워 엘리트 그룹인 당중앙위원회 위원이 된다. 1995년에는 노동당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권력 핵심에 진입했다.
승승장구하던 장성택은 2003년 10월 '김정일의 당 총비서 추대 6주년 중앙보고대회'에 참석한 이후 공개석상에서 사라진다. 당시 우리 정보기관은 장성택이 종파행위와 권력남용 혐의로 당으로부터 집중 검열을 받으며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장성택이 공개석상에서 사라진 시기는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 선생이 2003년 7월 4일 국회 공개 청문회에 나와,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 김정남하고는 대비가 된다"고 발언한 지 얼마 안 돼서다. 황 선생은 이 자리에서 "장성택의 큰형(장성우)이 수도방위도 맡는 3군단장이고 작은형(장성길)은 군단장급인데다, 자신은 노동당 조직지도부 1부부장으로 사방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았다"며 "장성택은 지금 사실상 북한의 제2인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부인이자 김정은의 생모(生母)인 고영희가 2004년 유선암으로 사망한 이후인 2006년 1월 28일 국방위원회가 주최한 설 연회에 김정일과 함께 참석하면서 공식석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2007년에는 조직지도부의 행정 담당 제1부부장으로 공식석상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업무를 다시 맡았다. 장성택은 2009년 초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보답인지 김정은 체제라는 3대 세습 체제가 등장하면서 그는 북한 내에서 김정은을 제외하면 가장 큰 권력을 움켜쥔 권력 핵심인물이 되었다.
장성택의 성격은 어떤가. 북한 전문가인 이명산씨는 그의 성격을 이렇게 전한다.
"북한의 어느 관리보다도 검열관 자격으로 해외여행을 많이 했으며 서방세계의 물정에 밝은 엘리트 중 엘리트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양주 한 병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시는 애주가이며 부하직원의 마누라를 포함해 반반한 여자를 보면 일을 끝내버리는 오입쟁이이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며 호방한 외향성 성격의 사내다. 일부 분석가들이 북한에 혼란이 폭발할 때는 당과 군부의 충돌로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장성택은 당과 군부 양쪽에 모두 신경세포조직이 있기 때문에 그런 혼란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성택은 남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어지는 이명산씨의 이야기다.
"2002년 10월 박남기 북한계획위원회 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18명의 남한경제시찰단이 남한에 왔을 때 장성택도 함께 왔다. 실제 시찰단의 우두머리는 장성택이었던 셈이다. 그는 남한에 8박9일 머무르는 동안 지하철, 고속철을 타보고 삼성전자, LG전자, 포항제철소, 현대자동차 등을 들러보았다. 그는 남한 각지의 놀랍고도 경이로운 경제발전 상황과 첨단 기술을 직접 목도하고는 잠을 설쳤다고 한다. 연회석상에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한숨만 내쉬며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 남북의 체제와 경제를 비교할 때 장성택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충격이 한숨과 술로 나타났던 것이다."
김용순과 장성택의 교통사고는 우연?
북한 관련 인터넷 사이트가 공개한 김일성 가족 사진. 김일성(가운데)과 김정일(왼쪽),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오른쪽). 1966년에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의 장녀와 결혼하면서 젊은 나이에 북한 권력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장성택의 부침 과정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교통사고다. 2006년 북한 권력 무대에 복귀한 장성택은 그해 9월 평양 모란봉 구역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장성택이 타고 있던 S600벤츠 승용차를 북한군 트럭이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였다. 그가 타고 있던 승용차가 폐차될 정도로 큰 교통사고였다. 장성택의 둘째형으로 인민군 중장이었던 장성길이 그해 7월에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발생한 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평양에서는 장성택에 대한 암살시도가 있었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장성택의 교통사고에 주목한 이유는 황장엽 선생 망명 직전 남측이 접촉했다는 또 다른 북측 고위 인사 김용순도 2003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였던 김용순은 그해 6월 16일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 입원치료를 받아오다 4개월여 만인 10월 26일 사망했다. 김정일의 외가 쪽 친척으로 알려진 김용순은 통일전선부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북한에서 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실세 중 실세였던 인물이다. 정적(政敵)을 교통사고로 가장해 처리하는 일은 독재국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에 김용순의 당시 교통사고 후 사망 사건도 많은 의혹이 제기됐었다.
거꾸로 장성택이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리제강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교통사고를 가장해 암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일도 있었다. 리제강은 2010년 6월 2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정규뉴스 시간에 이 사실을 알렸다. 리제강 사후 5일 뒤 장성택은 당시 김정일이 위원장인 국방위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정치적 라이벌의 교통사고 사에 이어 그 라이벌이었던 장성택의 승진이 발표되면서 장성택에 의한 리제강 암살설이 제기됐던 것이다.
이제 궁금해지는 것은 장성택의 미래다. 최근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부 강경파이자 장성택 견제파였던 김격식의 퇴진 등 일련의 움직임들을 볼 때 장성택은 김정은 체제하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당과 군은 물론이고 김정은조차 그를 어쩌지 못할 힘을 이미 갖고 있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있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문제는 그의 권력이 치마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김일성의 사위, 김정일의 매제라는 후천적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에 의해서 그의 권력이 최초 잉태됐다는 점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를 들어 한 북한 문제 전문가는 "김경희가 소멸된다면 장성택의 권력도 소멸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희의 건강 이상설이 나돌고 있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하기 직전 북한에 가서 장성택과 김경희를 만났다는 한 교포 대북 사업가는 "김경희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얼굴이 검은 게 간이 많이 나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사업가는 또 "그녀의 병은 체질 자체를 바꿔야 나을 수 있는 병"이라면서 "남한에 간암환자까지 고친 전문가를 찾아서 소개하려고 했는데 성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여자로 인해 생성된 권력이 여자로 인해 소멸될지도 모를 일이다.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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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2014.01.27 11:40
월간 조선이네 조선은 일본 매국노는 두둔 할건데 .....그러니 아직도 공산주의 운운 하면서 자기네 치부는 감추는거지 매국노..영웅 만들거나 매국노들을 국가발전의 ...운 운... 안중근 테러리스트 만드는 우리나라는 ..먼지 ... 그거 만드는 사람들이 대학 교수로 그냥 남아 잇는것 보면 ..학생들이나 국민들이나 ...... 저거 보다 더하면 더한거지 역사의식도 없는 나라이니 숭례문 태어먹고 ...부실로 자살인가 ... 이보다 더한 문제가 어디 있을까 ..남의 눈의 티클은 보면서 우리의 눈의 기둥은 왜 못보는지 ..ㅋ
대단한 나라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