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프로그래머에 대한 단상
2010.11.26 20:56
저는 컴퓨터와는 전혀 관계없는 업종에서 현재 일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2년 쯤 되겠네요. 제가 직장을 얻은 지 그때가 6년차 정도 되었지만 아직 한참 신참으로서 현장을 열심히 뛰어 다니던 시절입니다.
당시 80명이 근무하던 사무실에 어느날 컴퓨터 2대가 달랑 놓여지게 되었는데 그 누구도 이 신기한 물건을 다룰 수가 없었지요. ㅎㅎ 눈치 빠른 직원들은 부랴부랴 개그맨 전유성씨가 쓴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이미 그때 이책은 고전이었습니다.)를 읽으면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디스켓 5장으로 한글 2.1을 깔아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워드로 작성해 프린터를 통해 나오는 문서는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예술이었지요. 상사들 중에 어떤 이는 보고서를 보고 "왜 이런 문서를 인쇄소에서 찍어왔어? 귀찮지 않아?"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문화의 충격이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일하던 직장의 분위기는 특히 새로운 경향에 극히 둔감한.. 뭐 그런 곳이었기에 상황이 더 심했어요.
다행스런 점이라면 모두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80여명이 동시에 치는 타자기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기차 달리는 소음은 약과입니다.)에 도가 통한 사람들만 있었기에 자판을 빨리 익혔다는 사실이랄까요? ^^
그로부터 수년 뒤 저는 한 신문에서 어떤 기사를 보았습니다.
Java Programming Languge 창시자(창시자라기 보다는 아버지로 많이 불립니다) James Gosling 과의 인터뷰였지요.
자바 언어를 소개하면서 이 언어의 목적, 유연성 등에 대한, 저로서는 당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만 눈길을 끈 한가지는 고슬링이라는 사람의 외모, 추정되는 나이 정도였습니다.
?James A. Gosling
이 사람이 1955년생이라니까.. 그의 나이 43~4 세 되는 시기에 기사를 접한 셈이군요. 지금 위 사진은 비교적 최근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그 옛날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에도 허연 백발이었거든요. ㅎㅎ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던 저로서는 "아~ 이렇게 나이가 들어도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구나."하고 놀랍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 계속 접하는 다른 소식을 통해 외국에는 나이 60세가 다된 백발의 프로그래머들이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참 부럽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제 나이 34세쯤 되던 해에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Dummy 시리즈 책(Dummy는 바보, 멍청이라는 뜻으로 전문 분야에 있어 초보자를 위해 쉽게 풀어 책)을 뒤적거리다. C for Dummy라는 책을 보았지요. C 프로그래밍 언어를 재밋게 풀어 쓴 내용인데 아무 생각없이 사와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재밋다고 생각하던 순간, 책이 끝나 있더군요. 이게 뭐야? 하고는 또 다른 책을 구하러 나섰습니다.
이때부터 약 4년간에 걸친 허송세월이 시작되었는데요,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 틈틈이 시간을 쪼개 C, C++에 관한 책을 봤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고비를 넘질 못하겠더군요. 전문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요, 컴퓨터에 깊은 지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뭘 어찌해야할 지를 몰라 끝내 자포자기하게 되었습니다. - 그때 학원이라도 다녔더라면하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 손을 놓은 가장 큰 이유는 직장 생활 때문이지요.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소홀히 할 수는 없었거든요. 그야말로 성취감 하나 없이 쓸쓸히 물러나야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경험으로 한가지 얻은 수확이 있었습니다.
바로 프로그래밍은 속칭 '노가다'라는 것입니다. 이 코딩, 디버깅이라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리즘에 대한 이해, 수천줄에 이르는 코드(저는 이런 규모의 코드를 마주한 적도 없습니다)를 분석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프로그래머'는 그 용어에서 오는 느낌과 달리 점잖은 화이트 칼라가 아니더군요. 그야말로 육체적 노동에 더하여 극한의 정식 노동에 시달려야만 달성 가능한 직업이었던 겁니다. 아무리 개발도구(환경)이 좋아도, 라이브러리가 아무리 짜임새있어도, 디버깅 툴이 수고를 덜어줘도 노가다 중에 '상 노가다'가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단순 개발자를 넘어서 정작 프로그래밍 언어를 창안하고, 컴파일러와 인터프리터를 설계하고, 통합개발환경을 만들고, 디버거를 추가하고, 라이브러리를 확장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이런 일은 스스로 즐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위에 말씀드린 고슬링이란 분도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지만 이게 단순히 돈벌이의 수단이었다면 그는 그 힘든 일들을 헤쳐나오지 못하였겠지요. Linux 의 Linus Tovalds, Free Software Foundation (저 여기 기부도 했었습니다. ㅋ)의 대표이자 Emacs 의 창시자(Tmax 가 아닙니다. ^^) Richard Stallman 같은 이들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Richard Stallman
마치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난 4월 고슬링이 Oracle 사를 떠났다고 합니다.
원래 고슬링은 Sun Microsystems 사에 소속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Java 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Sun 사가 Oracle 사에 인수되게 되었는데 이때 Sun 사의 프로그래머들은 Oracle 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바로 Open Software의 개발을 계속한다는 약속을 얻길 원했는데요 - Sun 은 유명 Open Software 를 많이 지원해왔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 공짜 프로그램 VirtualBox, OpenOffice, OpenSolaris 같은 것들 말이죠. - Oracle 의 최근 행보가 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고슬링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소프트웨어 개발 철학을 갖고 있는 최고의 프로그래머, 그리고 그 소신에 벗어날 때 힘들게 얻은 직위를 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는 프로그래머.
그는 Oracle을 떠난 소감을 그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이 아리송하게 밝혔습니다.
Just about anything I could say that would be accurate and honest would do more harm than good.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바는 정확하고 정직한 것이 선하기 보다는 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90년대 중반부터 IT 붐이 불면서 벤쳐기업이다 뭐다면서 컴퓨터 공학과가 대학에서 최고의 인기 학과로 부상하는 등 부산을 떨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보여주는 결과는 우리나라가 하드웨어적으로 IT 강국이지만 소프트웨어적으로는 형편없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만을 증명하였을 뿐입니다. 그간 많은 벤처회사, 프로그래머들이 보여온 행태는 이 분야에 돈을 쏟아 부어야할 기존의 기업인들에게 실망만을 안겨준 사례가 많았습니다. 우리 프로그래머들은 투자자(고용자)들을 비난하지만 거기에는 그들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어줍잖은 실력을 갖고 '나는 남과 다르다'는 자만심이 넘친 얼치기 프로그래머들과 철학을 갖추기도 전에 돈벌이나 주식장난에 맛을 들인 얼치기 벤처기업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도 그 중 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과연 우리의 토양 중 그 무엇이 자라나는 세대들의 머리 속에 때돈을 거머쥔 Bill Gates 만을 기억하게 만들었던 것일까요??
닭이 먼저이든 닭걀이 먼저이든 간에 이런 세월 속에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원래가 노가다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덧붙여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삶의 질곡이라는 더 무거운 굴레를 씌우고야 말았습니다. 착취 수준의 근로시간과 형편없는 보수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죠. 언제쯤 그들이 자신의 철학을 지키면서 삶의 부담에서 벗어나 진정한 창조의 혼돈 속에서 세상을 향해 포효할 날이 올런지요?
먼 훗날, 여건이 바뀌어 참 프로그래머를 만나게 될 때 제가 비록 이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따끈한 소주 한잔 대접하면서 인생을 이야기할 영광의 시간을 갖게 되길 희망해 봅니다.
오늘 오랫만에 목욕을 하고 상쾌함과 노곤함이 섞인 상태에서 몇자 끄적거려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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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on 2010.11.26 22:03 -
명인 2010.11.26 22:24
프로그래머가 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얘기이군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회오리보이 2010.11.26 22:39
예전에는 어지간하면 CUI 즉, 직접 Code 를 일일히 자판으로 쳐가면서 머리를 싸메고 했다면,
최근에는 GUI 기반으로도 어느 정도 충분히 Program 을 작성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 신기하더군요.
저는 부모님께서 "수학은 모든 학문과 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이란다. 수학을 게을리 하지 말아라.
최소한 복잡한 수학공식은 못외우더라도 가감승제만이라도 잘하렴."
하셨을 때 등한시 했던 것을 뼈져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Programing 을 배우면서 느끼는 점은 수학
못하면 좀(이 아닐수도 있겠지만...) 힘들다는 것입니다. -
GodFather 2010.11.26 22:49
표현의 적나라함을 위해 우리말이 아닌 <노가다>라는 용어를 써 죄송합니다. (_ _);
-
Alan 2010.11.26 23:03 프로그래머들에게 늘 고마움을 갖고 잊지만 정작 고맙다는 말보단 이것좀 저것좀 칭얼거렸던 모습이 투영되며 반성하게 되네요.
좋은글 잘봤습니다.
-
돋을볕 2010.11.27 10:58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를 보고있습니다
글솜씨가 부럽습니다
GodFather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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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2010.11.27 17:53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 샌드위치 되어버린 세대.
미국은 60년대 후반부터 아이비엠 같은 초대형 회사에서 배출한 프로그래머들이 소프트웨어 산업의 기초가 되었지요.
그즈음 우리나라는 미군부대에서 폐기한 빳빳하고 질 좋은 컴퓨터 프린터용지를 노점 호떡 붕어빵 포장봉투로 재활용.
집에와서 빠닥 빠닥한 포장지를 분해해보면 알지 못할 숫자 기호 영어 가득했는데 그게 나중에 알고보니 볼 타자 프린터로 뽑은
코볼 프로그램 이였습니다. 조금만 늦게 태어났다면 더 골치아픈 세상을 살았을지 모른다고 위로 삼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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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님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