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여행자

2011.04.24 00:01

유체이탈 조회: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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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빨강머리 앤의 고향, photo by 지니

여행자 1

바다에 창이 하나 있었다.

엄마였을까, 알 수 없는 누군가

바다의 창문을 열자

파란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모든 기억을 잃고

오직 하나 남은 본능으로 촛불을 켰다.

노랗게 물든 바다 속에

가느다랗게 떨리는 별 하나 반짝였다.

나는 그것을 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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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 200년전에 발견된 백조의 호수, photo by 지니

여행자 2

갓난아이를 보았겠지. 어미보다도 늙은,

때론 어미보다 지혜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찾아오는 먼 우주의 여행자.

알았겠지, 그리고 잊었겠지, 그 여행자.

어미는 아이의 지혜를 빼앗고

아이는 그 어미를 배반해야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조건이란 걸.

배반하며 닮아가다가 마침내

늙고 추한 어미의 등짝, 그 쓸쓸한 벌판에

바람인 양 사랑을 새기는 것, 그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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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하바나 말레콘의 밤, photo by 지니

여행자 3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잊었으니.

외로웠을 것이다

홀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두려웠을 것이다

수레는 비어 있었으니.

네가 믿을 것은

네 안의 떨리는 별과

그 별을 따르려는 직관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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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시골 마을, 집으로 가는 버스, photo by 지니

여행자 4

얼마나 많은 집들을 지나쳐 왔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웃거렸는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분노했는가

혹은 용서하고 용서받았는가

시간이 흐르는구나. 그렇게 시간 속에 묻히는구나.

묻힌 자 썩고, 썩는 자 사는구나.

흐르는 모든 것을 경외할 때까지

흐르는 모든 것이 너를 아프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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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제주도, 빛의 정원, photo by 지니

여행자 5

순간이었다

빛이 벽을 타고 넘은 그 시간도.

순간이었다

벽에 걸린 빛에서 생명이 솟아난 것도.

순간이었다

너와 내가 그 빛 아래서 사랑을 나누었던 것도.

순간이었다

벽을 넘어 정적 속으로 너와 내가 사라지고 만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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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레, 하늘로 가는 길, photo by 지니

여행자 6

열망하되 욕구하지 말라.

구하되 기대하지 말라.

느끼되 탐하지 말라.

기뻐하되 머무르지 말라.

그리고 기억하라.

네가 왔던 하늘과 돌아갈 하늘에서

너는 단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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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하바나, 해질 무렵의 속도, photo by 지니

여행자 7

꿈속에서 나는 차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회색 벽 앞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빛이 쏟아지고 벽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벽이 다 녹고 나면 나는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마침내 이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속도였다.

벽보다 빨리 녹지 않을 나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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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시집이 있는 여행자의 방, photo by 지니

여행자 8

내 마음의 방

세월이 흐를수록 방은 침침해지고

나는 어두운 것들에 익숙해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다.

저기에 그제 읽던 책이,

저기에 어제 누웠던 자리가,

그리고 저기에 아침에 나갈 문이,

문 밖으로 계단이, 계단 아래

타고 떠날 오토바이가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안다. 떠나고 나면

그리움이 되리란 것도 안다.

내 마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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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자이살메르 사막의 태양 혹은 별, photo by 지니

여행자 9

밤이 깊었다, 여행자여.

별에서 별 사이로 바람이 분다.

멀리 푸른 밤바다 일렁인다.

싸우고 흘린 코피 한 방울,

복수심에 던진 돌멩이 하나,

흙을 털고 주워 먹은 밥 한 톨,

육교 밑 빈 깡통에 던져 넣은 동전 한 닢

휴지처럼 바람에 날린다.

서둘러라, 여행자여.

기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평화를 위한 기도의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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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 당신만 있던 바닷가, photo by 지니

여행자 10

저 여린 몸으로 살면서

누군가를 미워할 때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할 때마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지 않을 때마다

두려워하거나 두렵게 할 때마다

억지를 부리고 힘들게 할 때마다

온 우주가 너를 위해 눈물을 흘리었다.

너도 이제 너의 고향 우주로 돌아와

남아 있는 여행자들을 위한 눈물

함께 흘리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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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바라나시, 기차역에 잠시 머문 여행자들, photo by 지니

여행자 11

네가 할 일은 오로지

네가 누구였는지 기억해 내는 것.

사진가, 퀵 서비스 배달부, 백만장자도 아니고

대통령, 페미니스트, 혁명가, 사기꾼도 아니고

남자, 여자, 개, 돌멩이도 아니고

신부, 목사, 중, 랍비도 아니고

여행에서 만난 그 모든 것이 아니고 아님을

알 때까지 너는 여행자다.

짜고 맵고 시고 단 것도 아니고

아리고 쓰리고 그리운 것도 아니고

밉고 싫고 곱고 예쁜 것도 아니고

여행에서 경험한 그 모든 것이 아니고 아님을

알 때까지 너는 여행자다.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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