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야기 - 불패의 바둑 신,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고 마침내 인간이 되다.
2010.01.03 12:05
불패의 바둑 신,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고 마침내 인간이 되다.
최후의 본인방(本因坊혼인보) 슈사이(秀哉 1874~1940) 명인의 생애 마지막 승부바둑은 은퇴기였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이 기획한 “불패의 명인, 슈사이 은퇴기”의 도전자를 고르기 위해 일본 기원은 1년여에 걸쳐 시합을 벌였고, 결국 도전권은 30살의 젊은 강자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1909년 1월 25일~1975년 12월 19일, 이하 기타니)에게 돌아갔습니다.
1938년 6월 마침내 젊은 고수 기타니와 살아있는 바둑의 신 슈사이가 격돌하게 됩니다. 관전은 훗날 소설 “설국(雪國)”을 써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瑞康成)가 맡게 되는데 세상 참 좁지 않습니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6년전인 지난 1932년 도전에서 패배한 우칭위안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 1889 ~ 1972)의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세고에는 훗날 절친한 친구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죽고, 그의 막내 애제자 마저 병역 문제로 한국으로 귀국하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훈현이를 꼭 다시 데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하는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젊은 신예 기타니(당시 7단 30세 ? 왼쪽)를 맞아 은퇴기를 갖는 슈사이 명인(당시 65세)의 마지막 대국 모습 제한 시간 각 40시간 이 대국 이듬해 슈사이는 사망합니다. 영혼을 불사른 불꽃의 대결이라 할 만 합니다.
제한시간은 각 40시간. 시간제 바둑 역사상 최장이었습니다. 대국은 6개월에 걸쳐 펼쳐집니다. 전국의 유명한 정원을 옮겨가며 총 14번에 나누어 진행되는데, 65세의 명인은 대국 중간에 병환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이 대국에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유감없이 쏟아 붇습니다. 그러나 대국 결과는 백의 5집 패배. 불패의 신화가 깨지는 순간이자, 신이 인간으로 추락하는 현장이었습니다..
현대 바둑의 관점으로 볼 때 슈사이가 제 아무리 발군이라고 해도 이 승부는 불공평했습니다. 65세의 병약한 노인이 한참 젊은 최강자를 상대로 정선(덤없이 두는 것)의 치수로 대결을 한다는 자체가 억지였습니다. 이 대국을 총64회에 걸쳐 신문에 게재해 공전절후의 인기를 모았던 가와바타는 “이 한 판의 바둑이 명인의 생명을 빼았았다”라고 썼습니다.
5척 단신의 비쩍마른 체구에 장단지에 살이 하나도 없어 그 다리로 걸어다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인 슈사이를 가와비타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결코 고귀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야비하고 빈약한 모습에 가까왔다. 그런데 오랜 세월 기예(바둑)를 단련함으로써 바둑판 앞에 앉으면 그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어 주위를 위압했다.”
슈사이는 구시대를 부정하는 신포석(주1)을 싫어했고, 그래서 신포석의 상징인 기타니에게 질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소비 시간을 보더라도 기타니의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바둑이 끝났을 때 백은 19시간 59분, 흑은 34시간 19분. 기타니의 장고는 병약한 명인의 진을 뺏을 것입니다. 명인이 죽고난 후 훗날 이 점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을 때, 기타니는 당당히 맞서 얘기합니다. “불패의 명인인채로 은퇴하는 것이 바둑계에서 일어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선배 고수를 뛰어넘는 것이 승부 세계의 미덕이고, 후배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주1) ? 신포석(新布石) 젊은 강자 기타니와 젊은 천재 우칭위안이 공동 연구한 새로운 포석이다. 당시 일본 바둑계는 기성(碁聖)으로 꼽히던 도사쿠(道策)이후 초반 포석의 주류가 소목이었으며, 외세를 중시할 때 가끔 고목을 두었다. 포석단계에서 “화점”에 두는 이상한 “잡수”를 두는 신포석은 전통의 명인 슈사이 입장에서 오늘날 정통 클래식 음악계의 힙합이나 랩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엄숙하게 진행해야 할 결혼식에 배꼽티, 청바지를 입고 나온 신부를 본 듯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가와바타는 훗날 이 한 판의 대국을 “명인”이라는 소설로 펴내게 되는데, 바둑 소설뿐만 아니라 문학적 가치로도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꼽히는 이 소설은 대국의 시작부터 명인의 죽음까지 담담한 필치로 담고 있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 康成 1899년6월 14일 ~ 1972년 4월 16일)의 1954년 모습
슈사이는 은퇴하면서 본인방(혼인보) 후계자를 지명않으므로 본인방의 세습제도가 막을 내리게 되는데, 자신의 후임을 일본 기원에 위탁하게 되었고, 일본기원은 마이니치(每日) 신문의 주최로 본인방은 도전기(누구나 대국의 승자가 다음 대회까지 본인방으로 인정)로 변경되게 됩니다. 근대 일본 바둑 아니 근대 세계 바둑의 역사가 저물고 새로운 현대 바둑이 태동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불패의 바둑 명인 슈사이! 그는 불패의 명예에 행여 패배라는 오점이 묻을까 두려워하기 보다는 자신을 향해 도전해 오는 사람들을 결코 피하지 않았던 진정한 승부사였습니다.
일본은 자국이 세계최강이라고 여겨지던 무렵, 자국 바둑 실력의 우수성을 세상에 자랑하고자 한 수 아래라고 생각되는 중국과 1985년 세계 첫 교류전인 “일중 수퍼 대항전”을 자국에서 개최하였으며, 이것을 모티브로 1989년 대만의 대부호 잉창치가 중국 바둑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바둑 올림픽”을 기획합니다. 대회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따 “잉창치배(應昌期杯)” 바둑 대회로 정하고 상금은 윔블던 테니스 대회보다 크게 정하자는 잉창치의 주장대로 총 규모 100만 달러 우승 상금 40만 달러로 정합니다. 이 소식이 일본 기원에 전해지게 되고 일본은 행여 대만에 선수를 빼앗길세라 1988년 서둘러 “후지쯔 배” 세계 바둑 대회를 개최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동상이몽을 꾸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국 바둑이 세계 최강이라고 믿었고, 그것을 증명하고자 각자 세계 바둑대회를 기획하고 개최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맙니다. 삼국중 최약체로 믿었고 존재 가치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삼류 높게 봐줘야 이류라고 생각했던 한국이 우승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일본 바둑계는 이후 쇄국정책을 폅니다. 자국 대회를 세계대회로 개방하면 한국 기사들이 “싹쓸이”하는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싱가폴 대첩”으로 불리우는 1989년 잉창치배(應昌期杯) 대회 이후 일본은 자국 주최 기전을 외국 기사(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한국 선수)가 휩쓸어 갈까 염려되어 빗장을 잠급니다. 이러한 결정은 한 때 세계 최강이었던 일본 바둑이 오늘날 바둑 삼국중 최약체 국가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더 이상 젊은 바둑 팬을 끌어 들이지 못함으로써, 일본 대국장에는 머리가 허연 바둑팬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에 나타난 바둑 신동 우칭위안(당시 15세)의 소문을 듣고, 그의 천재성을 꽃 피워 주기 위해 일본에 데려오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그의 스승인 세고에가 당시 일본 총리와의 면담에서 했던 대화를 들어보면 “만약에 그 청나라 신동이 우리 일본의 명인위를 빼앗아 간다면 어쩔 것인가? “그것이 바로 내가 그 아이를 데려오고 싶은 이유”라고 설득했던 세고에의 넓은 마음, 도전해 오는 강자들을 결코 피하지 않았고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진검 승부를 마다하지 않았던 불꽃의 명인 슈사이의 오늘 날 일본 바둑계를 향한 질타가 들리지 않습니까?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 1889 ~ 1972) 1909년 방원사(方圓社)에 입문하여 바둑을 두고 있다.(사진 왼쪽) 방원사는 일본기원의 전신이다. 1924년 슈사이를 도와 일본기원을 설립한다. 2009년 8월 29일 일본기원은 세고에를 11번째 인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한다.
남자 바둑은 제쳐두고 지난 2009년 12월 서울에서 벌어진 정관장배 바둑대회 참가 여자 선수들의 나이만 보아도 일본은 세대 교체를 이루지 못하여 37세, 41세등 현역에서 은퇴해야 할 노익장들이 아직도 현역선수로 나오는 있는 실정이며, 이에 반해 중국은 10대들의 맹활약으로 2010년 초 중국 광저우에서 속개될 정관장배 3라운드에서 우승이 유력시 되는 점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바둑이 체육이 된 오늘 날 현대 바둑에서 더 이상 삼 사십대의 노인(?)들이 두뇌 회전이 한참인 십대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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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ㅉl 2010.01.03 12:37 -
낙장불입 2010.01.03 13:13
그러고 보니 바둑 기사중 비만이신 분이 한 분도 안계시군요. 명 해설가이셨던 고 조남철 국수의 제자 고 김수영 사범님이 조금 통통하셨더 정도이고, 조훈현 국수의 친구이신 장수영 9단이 조금 통통하다 한 정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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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AN 2010.01.03 13:00 낙장불입님
전 바둑의 오묘한함을 배우지를 못해서 글 읽기만 계속 합니다좋은글 감사 드립니다
<본인 왈 >
아주오래된 이야기/
제누이동생이고등학교다닐때/
어느날 제누이동생과 아버님 둘이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그 광경을 쭈-욱 지켜 보면서/
어 ! 이런 된장 난 여지껏 모하고 살았는지/
누이보다 못한 찌질이도 못난노-ㅁ/
이랬던적이 있었습니다 /
그때의 여파가 또 슬며시.......아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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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2010.01.03 14:28 출석도장 꾸욱 찍고 갑니다.
낙장불입님,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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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2010.01.03 15:1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바둑을 둬보면 그사람의 성격이 고스라니 바둑판에 나타난다고하죠...
낙장불입님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
이번에 다시 바둑돌을 함 쥐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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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코 2010.01.03 15:32 국제대회에서 일본이 죽쑤는 이유가 뭘까요?
바둑격언중에 정확한 표현은 모르겠지만..
국가의 국운과 같이 한다고하죠.. 즉 한 국가의 국운이 상승하면 바둑의 운도 같이 상승한다는 뭐 그런뜻..
가만생각하면 일본의 바둑이 맹위를 떨칠때와 일본의 국운이 좋을때 맞죠..
그리고 우리나라가 국제대회 싹쓸이 하다 시피 할때의 시기와
또 요즘 중국의 무서운 상승세.. 참 맞는말입니다.. 최고수들은 중국과 우열을 못가린다고 해도
중.하위급으로 내려가면 확실히 중국에 밀리죠.. 뭐 어찌보면 당연한 애기 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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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장불입 2010.01.03 16:04
"바둑이 융성해야 나라가 산다"며 마오쩌뚱(毛澤東)이 국가 주도로 바둑을 육성한 정책이 실제로 들어 맞고 있나요? 우리나라 태릉 선수촌 규모의 중국기원 기사 합숙소와 단체 훈련은 입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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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코 2010.01.03 17:18 중국의 그런 바둑의 스포츠화.. 제 개인적으론 정말 싫더군요..
한국기원도 거기에 발맞추려고 애쓰는 모습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구요..
집에 유선방송에서 바둑티비를 방송해 줬는데 몇달전 디지털방송으로 채널 편성하는 바람에 지금은 못보고 있는데요
한참 볼때 한국 바둑리그에서 사회자들이 기사들을 소개할때 조훈현선수.. 이창호선수.. 등등
그소리 들을때마다 정말 뭐라고 해야하나요...참 듣기 싫더군요..
시대가 변하면 어쩔수 없다고 하지만 요즘 바둑문화가 한편으론 씁쓸한 마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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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달아저씨 2010.01.03 18:10
현재 진행중인 한국바둑의 쇠태는미리 예견된것입니다
퍠쇠적인 한국기원정책은 조지훈-조훈연-이창호 등 스타들의인기에 부합하여 한때 저변을확대하고
대중들의 지지를 받던시절도있었으나 그들만의 끼리끼리문화는 절대다수의 아마추어 호응을 얻지못하고
새로 농사지을생각없이 한정된 자산을 우리끼리 나눠먹을 긍리만하다가 결국은 스타들의 쇠퇴와 운명을 같이하고있습니다
아마추어기사 실력도 안돼는 절반이넘는 프로들은 과감히 바둑보급기사로 전향시키고 국내뿐아니라 해외 프로와아마
구분없이 대회를 오픈하여 저변을넓히고 강자를 육성해야합니다
현재남아있는 스폰서들도 우리밥그릇이라고 우리끼리나눠먹을 궁리만하다보면 그나마도 깡통찰날이 머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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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달아저씨 2010.01.03 18:30
첨언하자면 바둑을 잘모르시는 분들은 바둑을 도와예 에 결부시켜 동경하시는 분들이계신데
단언컨데 바둑은 결코 道 도아니며 禮 도아닙니다
물론 바둑을 좋은목적으로 잘 활용하면 수양의도구로서 좋은역활을할수있지만 그바둑으로 내기바둑이나 일삼는다면 그건
361장으로 이뤄진 변화무쌍한 도박기구에불과하게됩니다
다시말하면 바둑을 두는사람이나 목적이 도와예 그리고 수양을 논하는것이지 바둑그자채는 하나의도구에불과하다는것입니다
바둑 볼 때마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
뚱뚱한 사람이 거의 없어요..
두뇌를 혹사시켜서 그런가 하는 생각...
조금은 단순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