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시 - 도종환, 이해인, 김영랑, 이채
2023.05.12 17:53
5월의 시 - 도종환, 이해인, 김영랑, 이채
5월이라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의 경쾌한 시가 많을 줄 알았는 데 의외로 가슴 아픈 시들이 꽤 많네요. 왜 그럴까? 생각하며 읽어보니 이해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꽃이 많이 피는 계절인데 사랑하는 연인과 같이 있으면 그것이 더없이 행복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엔 얼마나 가슴이 쓸쓸할까요? 그런 상심의 감정을 시로 표현한 겁니다. 그렇잖아요? 기쁘고 행복할 땐 그것을 즐기는 것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니 그런 것보단 쓸쓸한 마음을 글로 남기는 것이 더 어울리잖아요?
몇 편 읽고 나니 그 마음에 공감이 갑니다.
5월의 시 1 - 오월 편지 / 도종환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있는 자리마다 깊디깊은 침묵이 앉습니다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 있는 그곳에도 봄이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다 그러하겠지만
오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멥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 없이 흔들리는 붓꽃 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
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자리로 바람이 가득가득
몰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 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 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 와 머물다 소리 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2021.03.26 - [시 읽는 하루] - 담쟁이 - 도종환, 고난과 한계의 극복 의지
양양 남대천 게이트볼 공원
5월의 시 2 - 5월의 시 / 이해인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초록의 서정시를 쓰는 5월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피곤하고 산문적인 일상의 짐을 벗고
당신의 샘가에서 눈을 씻게 하십시오
물오른 수목처럼 싱싱한 사랑을
우리네 가슴속에 퍼올리게 하십시오
말을 아낀 지혜 속에 접어둔 기도가
한 송이 장미로 피어나는 5월
호수에 잠긴 달처럼 고요히 앉아
불신했던 날들을 뉘우치게 하십시오
은총을 향해 깨어있는 지고한 믿음과
어머니의 생애처럼 겸허한 기도가
우리네 가슴속에 물 흐르게 하십시오
구김살 없는 햇빛이
아낌없이 축복을 쏟아내는 5월
어머니 우리가 빛을 보게 하십시오
욕심 때문에 잃었던 시력을 찾아
빛을 향해 눈뜨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십시오
속초 사잇길 8길 청초천길
5월의 시 3 - 오월 / 김영랑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이랑 만(萬)이랑
이랑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여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버리련?
속초 사잇길 8길 청초천길 울산바위
5월의 시 4 - 중년의 가슴에 5월이 오면 / 이채
나이가 들수록
홀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가슴을 지닌 사람이 그리워지네
사람은 많아도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알던 사람들은
지천에 꽃잎으로 흩날리는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쉬이 작별을 하며 살아가는가
너와 내가
어느 날의 비에 젖어
채 마르지 않은 몸이라 할지라도
다시 피는 꽃이 되어
향기를 나누고 싶은 간절함이여!
다시 서는 나무가 되어
지나는 바람 편에 안부라도 전해 볼까
피고 지는 일만이 일생은 아니거늘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꽃들도 서글픈 이야기를 하는가
꽃만 두고 가는 세월이여!
중년의 가슴에 5월이 오면
인생의 오솔길에 꽃잎만 쌓여가네